본문 바로가기

문장16

하늘과 돌멩이 오규원 하늘과 돌멩이 오규원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2020. 5. 29.
스승의 날 아침 9시 전화벨이 울렸다.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에는 "000 선생님"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보내드린 선물이 어제 도착했다는 택배 회사의 송장은 확인했지만, 교수님이 직접 받으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화면에 뜬 선생님 이름을 보자 나는 교수님께서 선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갑고 어려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은 내게 고맙다는 말씀과 나와 아내의 안부를 물으셨다. 나 역시 교수님의 안부를 여쭙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교수님과의 대화는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아마도 부족한 제자의 능력과 꿈이 아지랑이처럼 섞여 어른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통화를 하시면서 교수님은 내게 존댓말을 하셨다. 불편하니 편히 말씀을 하시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나이도 이제 .. 2020. 5. 15.
드라마 "나의 아저씨" 드라마 초기 어른 남자와 어린 여자의 연애 이야기 아니냐는 염려(라고 쓰고 설레발 혹은 질투라고 읽는다)가 있었다. 또 어린 여자가 맞는 장면이 나왔다고 걱정(이라고 쓰고 억지라고 읽는다)도 있었다. 나는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야 정주행을 했다. 정주행을 한 후 드라마의 ost와 배우들의 대사가 자꾸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아저씨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그리고 숨소리. 마치 지안이처럼 아저씨의 마음을 엿듣는 기분이었다. 결국 한 번 더 봤다. 역시 좋은 대본과 감독과 배우들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지안이의 할머니 역이 손숙 씨였다니... 영영 모를 뻔했다.) 또 한 편의 좋은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외국의 드라마들을 일부러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아마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가 그 시작.. 2018. 6. 19.
오 분간 나희덕 오 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 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2018.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