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16

스승의 날

아침 9시 전화벨이 울렸다.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에는 "000 선생님"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보내드린 선물이 어제 도착했다는 택배 회사의 송장은 확인했지만, 교수님이 직접 받으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화면에 뜬 선생님 이름을 보자 나는 교수님께서 선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갑고 어려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은 내게 고맙다는 말씀과 나와 아내의 안부를 물으셨다. 나 역시 교수님의 안부를 여쭙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교수님과의 대화는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아마도 부족한 제자의 능력과 꿈이 아지랑이처럼 섞여 어른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통화를 하시면서 교수님은 내게 존댓말을 하셨다. 불편하니 편히 말씀을 하시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나이도 이제 ..

문장 2020.05.15

드라마 "나의 아저씨"

드라마 초기 어른 남자와 어린 여자의 연애 이야기 아니냐는 염려(라고 쓰고 설레발 혹은 질투라고 읽는다)가 있었다. 또 어린 여자가 맞는 장면이 나왔다고 걱정(이라고 쓰고 억지라고 읽는다)도 있었다. 나는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야 정주행을 했다. 정주행을 한 후 드라마의 ost와 배우들의 대사가 자꾸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아저씨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그리고 숨소리. 마치 지안이처럼 아저씨의 마음을 엿듣는 기분이었다. 결국 한 번 더 봤다. 역시 좋은 대본과 감독과 배우들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지안이의 할머니 역이 손숙 씨였다니... 영영 모를 뻔했다.) 또 한 편의 좋은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외국의 드라마들을 일부러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아마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가 그 시작..

문장 2018.06.19

오 분간 나희덕

오 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 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문장 2018.04.10

허영만의 커피 한잔 할까요?

제목처럼 정직하게 허영만 작가의 커피에 관한 만화이다. 커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즐거운 마음으로 재밌게 읽었다. 가상의 커피 가게와 사람들을 빌어 커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재밌었던 것은 커피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커피 자체보다는 커피를 매개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특정 원두의 생산 이력과 로스팅, 추출 과정 그리고 그 맛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만화는 하루의 시간 중 어느 땐가에 꼭 커피 한 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는 읽었다. 때문에 "2대 커피"의 주인인 박석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커피뿐이야"는 말이 이 만화를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커피는 여러 기호 식품 중 하나일 뿐이지만, 한편으로 그가 손님에..

문장 2017.08.20

아파트가 운다 최금진

아파트 운다 최금진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쓱하다 누군가가 죽여달라고 외치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는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아파트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곤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

문장 2017.08.18

北魚 최승호

北魚 최승호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문장 2017.07.07

존나 존맛

꽤 오래 전부터 "존나"라는 말은 자주 쓰였다. 이후 개인 블로그와 맛집 후기의 유행이 맞물리면서 "존맛"이라는 파생어가 등장했는데 그 사용이 매우 빈번하다. 음식점 후기를 찾다보면 7할 이상에서 이 단어를 보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음식점 후기의 특성상(?) 젊은 여성들의 포스팅일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인데, 꽤 민망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쓰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자. 먼저 기본형 "좆나오다"가 "좆나게"로 활용되고 "좆나"가 되어"존나"로. 그리고 이 "존나"가 "맛있다"와 매우 자주 결합하면서 "맛"이 어근이 되어 "존맛"이라는 파생어가 탄생하게 되었다,라고 추정해본다."좆"+ "맛"이라는 합성어(명사+명사)로 보기에는 과한 측면이 있다.(과하지 않다..

문장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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